살아가는이야기

백조일손지묘

와신 2012. 3. 26. 19:15

[안내문에서 발췌]

 

- 예비검속(豫備檢束)은 비극의 씨앗
1950년 6월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하자 내무부 치안국에서는 당일 14:00시 요시찰인 전원을 구금할 것을 전국 경찰서에 지시함에 따라 제주도 전역에서는 1,200여명을
예비검속 하였는데 그중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는 347명을 검속,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와 한림 어협창고, 각 지석 등에 분산 구금하였음.

 

- 반인륜적 양민학살
남침한 북한 공산군이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수도를 대전을 거쳐 대구로 그리고, 8월18일에는 부산으로 퇴각하는 와중에 육군본부 정보국 제4과(CIC) 김창룡(당시 대령)과장의 지시에 의하여 경찰이 분류한 C,D급 예비검속자를 처형하기 시작하였는데 모슬포 경찰서 관내 347명중 60명은 1950년 7월 16일 군에 인계되어 집단 학살 되었으며(장소미상) 동년 8월20일(음력 7월7석) 새벽 2시에 63명(한림 어협창고 및 각지서 구금자 中) 새벽 5시경 132명(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 구금자 中)을 계엄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모슬포 주둔 해병 제3대대(대대장 김윤근 소령) 장병에 의해 송악산 섯알오름, 파괴된 일본군 탄약고에서 집단 학살 함. 한편, 제주경찰서 관내와 서귀포경찰서 관내에 그금된 선양들은 처형된 일시와 장소도 정확히 모른체 불귀의 원혼이 되었다.

 

- 천인공노할 시체의 암매장
계엄당국은 반인륜적 학살행위를 은폐하기 위하여 유족의 시체인도를 무자비하게 거부하여 비명과 절규의 외마디가 가시지 않은 선혈이 낭자한 시체위에 미리 준비된 돌덩이로 짓눌러 암매장하고 그 일대를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으로 설정, 무장군인에 의하여 경비를 강화 하였음.

 

- 시신수습과 백조일손 지지(百祖一孫 之地) 안장
유족들의 시신 인도를 완강히 거부하던 군 당국은 부대확장 공사도중 유해가 표출되자 유족들의 요청에 의하여 시신수습이 허용되자 유족들은 1956년 5월 18일9음력4월9일) 6년 가까이 흙탕물속에 묻혀 억눌리고 뒤엉킨 시신의 인양을 위하여 좌용진씨가 제공한 양수기로 물을 뽑아내고 유골을 발굴 하였으나 자타의 구분은 커녕 작은 뼈는 거의 흔적이 없었으므로 132개의 칠성판위에 머리하나에 등뼈, 팔, 다리뼈들을 적당히 맞추어 132구로 구성하고 유족의 지성으로 마련한 현 묘혁(483평)에 안장하여 百祖一孫 之地라 명명하였음.

 

百祖一孫 之地의 뜻 : 조상이 다른 일백서른두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한 자손이라는 뜻(제안 : 故 이치훈, 이성철)

 

- 군사정권에 의한 묘비의 파괴와 강제이장
5.16군사정권은 군경이 자행한 반인륜적 만행의 흔적을 없애도록 경찰에 지시 하였으며 이에 따라 1961년 6월15일 서귀포경찰서장의 지휘로 모슬포 지서 급사로 하여금 묘비를 파괴하는 한편 집단 조성된 백조일손묘역을 해체하도록 유족들을 강압함으로써 선량한 유족들은 제2의 잔인한 피해를 의식하여 23위는 야밤을 이용하여 타지로 이장하였음. 그러나 전 유족의 안위와 자손만대의 화합을 추구하며 2002년 4월5일 41년만에 7위를 본 묘역으로 재 이장함.

 

 

 

 

 

 

 

섯알오름 학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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