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악산 철탑임도 라이딩
선돌 라이딩 가가로 한날...
코스가 좀 빡세서 그랬을까? 참석 인원이 저조합니다. 불곰님, 이더리님, 망치님, 그리고 저까지 포함해서 4명입니다.
한라산MTB 라이딩 코스 얼핏 보니 미약산 인근 철탑 임도 라이딩 계획이 잡혀 있던 것 같아...은근슬쩍 같이 묻어가 보기로 합니다.
철탑로는 하찌마끼길 아래로 제주도를 종단하는 모양새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찌마끼길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라산 목재와 버섯 등을 강탈하기 위해 한라산 중턱 숲을 뚫어 만들어 놓은 길을 말합니다.
일본말로 '하찌마끼'란 머리에 두르는 띠를 말하는데...한라산 중턱을 머리띠처럼 길을 냈다하여 '하찌마끼'라 불렀다 하네요.
산림청에서 '한라산 환상숲길'로 명명하고 보수개발해서 개통을 한다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는 이 길은 한바퀴 돌았을 경우 총 길이가 80km에 달한답니다.
입구는 수악교와 영실입구 등지에 있으며,
오늘 가볼 구간은 미악산 뒤쪽 난대산림연구소에서 시험재배하고 있는 시험림을 관통해서 1100도로 인근까지 송전철탑을 좆아 가 볼 것입니다.
▽ 아래 보이는 산이 미약산 입니다. 미약산은 해발 576m에 달하고 현 시점에서 올라야할 높이는 113m가 되겠습니다.
쌀을 쌓아 놓은 모양이라 해서 米岳山이라고 부르며 쌀오름, 쏠오름, 솔오름 등으로 불리웁니다. 미악산 뒤로 백록담이 보이고 있습니다.
▽ 우리가 라이딩할 코스입니다.
송전철탑이 보입니다. 하찌마끼길을 따라서 송전탑을 설치했는데 대략적으로 송전탑과 송전탑 사이 길이는 300m를 기준으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 한라산멤버들 모습입니다.
왼쪽 상단부터 구서방(니콜라이)님, 여울에서님, 윙이님, 오름파파님, 탐라님, 트로틀님 되시겠습니다.
▽ 미악산 앞 전망대에서 이더리님 구령하에 몸풀기 체조하고....
▽ 미악산 업힐 코스로 올라가 봅니다.
▽ 난대산림연구소 간판이 보이고...
끙끙거리며 오르고 또 오르려니...백록담이 지척에 보일정도로 올라 가더군요...
나중에 안 사실이었는데...무려 3km에 달하는 업힐 코스 되겠습니다.
▽ 뒤에 미악산 정상이 눈높이와 일치할 정도로 올라와 버렸습니다.
▽ 시험림 끝나는 지점에서 서북쪽으로 길을 틀어...산짐승 출입을 막아 놓은 펜스를 넘어가 봅니다.
요 다음부터는 송전탑만 보면서 나아가면 되겠습니다.
▽ 한 3년전에 왔을때는 이만큼 길이 나쁘지는 않았었던 것 같던데...강력한 태풍 몇번 지나가고 나서 길이 엄청나게 패어 버렸습니다.
이더리님 왈....완존히 '돌탱이 길' 입니다.
▽ 울퉁불퉁 계곡도 몇개씩 지나고...미끄러지고 자빠지고...난리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그래도 이 무더운 뙈약볕을 피해 션한 숲길을 라이딩 하는 맛이란...세상에 돈주고도 바꿀 수 없는 길입니다.
다음에 다시올때를 기약하며 쓰러져 있는 나무들도 치워가면서 전진하고 있습니다.
▽ 요런 계곡 몇개 지나면서 중간에 싸가지고 간 김밥 풀어 먹으면서 오늘 하찌마끼 임도 라이딩을 마쳤습니다.
▽ 한라산mtb 회원님들 덕분에 좋은 코스 라이딩 했는지라 넘 감사했습니다.
미악산 전망대에서 마신 캔맥주 너무 시원했습니다. 다음 연합라이딩을 기약하며 한라산mtb님들과의 아쉬운 이별을 하고...
오름mtb 회원님들은 조금 라이딩이 부족했는지....자연바람코스 다운힐 하기로 하고...1100도로 바람코스에 내려 드리고... 제2산록도로에서 다시 픽업해서
제주시로 들어 왔습니다.
▽ 철탑 임도 라이딩 코스 그려 봤습니다. 대략 20여킬로 탄 것 같습니다.
업힐 3km, 하찌마끼길 5km, 송전탑 16개 넘었구요...급강하 돌탱이 다운힐길 1.57km 되겠습니다.
어깨쭉지랑...손아귀에 충격이 많이 가서 제법 힘들었던 다운힐이었던 것 같네요...오름파파님 요기서 자빠링 하셨는데...얼른 털고 일어 나시길 빌어보며
오늘 라이딩 후기 여기서 접어 봅니다.^^
P.S. 하찌마끼길 검색하다 제주일보에서 좋은 정보 검색되었길래 첨부해 봅니다. 시간되는 횐님들 천천히 읽어 보세요^^
[주도로와 하찌 마끼(머리띠) 도로의 생성 과정]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는 합방 초기부터 경부선 개설을 시작으로 철도 도로 항만 등 식민지경제를 수탈하고 그들의 경제권에 편입,종속시키는데 필수적인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다.
당시 제주도는 다른 지방보다 교통사정이 한층 열악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1912년부터 2년간 기존도로에 대해 대대적으로 정비작업을 벌인 후 1914년에는 3개년 계획으로 도로 확장공사에 착수했다.
1917년 마침내 총 연장 181km, 너비 6m로 확장돼 자동차의 왕래가 가능해졌고 이후 1932년에는 너비 10m의 도로로 재단장됐다.
이 같은 교통상황은 ‘천혜의 보고(寶庫)’ 제주도를 각종 산물의 생산기지로 만들고자 했던 일제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제주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물론 제주 개발에 따른 풍부한 산물을 한곳으로 모으고 이를 수송할 수륙교통시설에 대한 확충이 무엇보다 시급했으며 이 같은 시설의 설치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경제정책에서 우선순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1937년 제주도개발 10개년 계획에도 당시 이러한 사정을 고려, 도내 도로 이용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고 조사해 도로 보수와 신설 계획을 수립한 내용들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특히 일제는 전쟁물자 확보 차원에서 추진된 중산간 일대 개발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중산간 주요 마을과 해안마을, 항구 등과 연결되는 도로 개설이 절실했다.
△ 1937년 제주도개발계획 수립 이전 도로 상황
1910년 합방할 당시 제주도내 주요 도로는 제주~대정, 제주~정의를 연결하는 노선과 제주에서 한라산을 횡단해 서귀포로 이어지는 노선 등 3개의 주요 도로와 해안선을 따라 각 마을을 잇는 간선도로가 있었으나 광야에 한 줄기 선으로 이어진 들길에 불과했다.
제주~모슬포선(57㎞)와 모슬포 성산포선(79.2㎞), 제주~성산포선(48.75㎞)을 연결하는 일주도로와 한라산 횡단로로인 제주~서귀포선(43.45㎞)에 대한 새단장을 마친다. 또 제주와 서귀포 주변 도로가 하천을 통과해야 하는 지점에 18개의 교량을 설치하기도 했다
1932년 완료된 일주도로에 대한 보완공사에도 불구하고 비가 오는 날씨가 이어지면 도로에 물이 고이고 하천을 건너갈 수 없을 정도로 차량 소통에 불편이 여전했다. 일제는 이 도로들을 3등 도로로 분류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5년간 총 사업비 20만원 들여 일주도로와 한라산 횡단도로 등 총 228.4㎞에 이르는 구간에 대한 교량.배수로.물빠짐 시설 등 시설물 보완 사업을 제주도개발계획에 반영하고 이를 적극 추진했다.
△ 제주도개발계획상의 도로 개설사업
일제는 제주도개발계획을 수립하면서 군수물자의 주요 생산지역인 제주도내 중산간 지대에 대한 개발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따라 일제는 중산간 지대의 농경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비롯해 목장지대의 축산물, 산림자원 등의 신속한 운반 위해 현재의 도로망과 거의 흡사한 도로 개설 계획을 수립한다.
일제는 이를 위해 10년간 총 사업비 280만원을 투입한다. 이 중산간 도로는 중산간 주요 마을과 해안선을 따라 설치돼 있는 일주도로와 연결하는 14개 노선과 중산간 지대를 한 바퀴 순환할 수 있는 환상선(環狀線), 한라산 등반로 등 총 16개선으로 이뤄졌다.
이와 함께 당시 일제가 중산간 지대 곳곳에 대한 개발의 손길을 뻗기 위해 중산간 마을간을 연결하는 송당~와산선 (길이 13km.너비 6m, 사업비 7만8000원)과 구룡~황무선(표선) (길이 8km.너비 6m, 사업비 4만 8000원)도 빼놓지 않았다.
특히 일제가 수립한 제주도개발 10개년 계획에는 그동안 도로 공사에 참여했던 노무자들의 증언에 의해서만 중산간 일대의 산림과 버섯 등 임산자원을 침탈하기 위해 건설됐다고 확인됐던 일명 ‘하찌마끼’(머리에 두루는 띠)도로에 대한 실체가 드러났다.
일제가 세운 도로 개설 계획에서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일본인 관광객의 관광과 한라산 일대의 식물생태에 대한 학술 연구를 위해 한라산 등반로의 개설 계획이다.
관음사를 출발해 한라산 정상을 거쳐 당시의 남원면 논고악에 이르는 너비 3m의 25km 구간(사업비 8만원)인 한라산 등반로 건설계획이 수립됐다는 것은 일제가 한라산 일대의 특이한 식생을 학술적으로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입증되는 것이다.
이처럼 일제는 제주도를 하나의 수탈 기지로 변모시키기 위해 철저한 현지 조사와 계획아래 해안 지대는 물론 중산간 일대 곳곳까지 도로망을 설치하는데 열을 올렸다.
더욱이 각종 도로 개설.보수 사업 등 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경찰력의 지원을 등에 업고 도민들을 작업에 동원했음은 물론 도로에 편입되는 토지에 대해서도 무상으로 강제몰수해 개발계획이 아닌 수탈계획이었음을 반증했다.
해방 때까지 계속된 이 같은 도로 정비 때는 집집마다 작업구역을 할당해 도민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는데 노약자나 식구가 적은 집일수록 노역 때문에 부담이 가중됐다.
아무튼 제주도 근대화의 주 동맥선으로 오늘날 우리가 쌩쌩 달리고 있는 일주도로와 중산간 도로에는 핍박과 설움으로 나날을 보냈던 선조들의 피와 땀이 진하게 배어 있다.